정중동-어느 동성애 반대 페이지

 정중동(靜中動)이라는 말이 있다. 고요함 가운데 움직임이 있다니, 언뜻 모순되어 보이는 이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사실 정지는 아무 움직임이 없는 상태가 아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엄격한 정지와 규율을 의미하는 차렷 자세다. 팔을 겨드랑이에 딱 붙이고 두 다리를 모으고 고개는 정면보다 약간 아래로 내리고 시선은 정면을 바라본 채로 움직임 없이 서있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이건 움직이지 않으려는 움직임속에서만 가능하다. 고독과 자기 성찰과 같이 외부와의 접촉을 끊어내는 모든 인간의 존재 양상 또한 마찬가지다. 고요는 자기 안으로의 움직임이다.


 

 그러므로 정중동은 엄밀히 말해 동중동(動中動)이다. 동중동에서 앞의 움직임과 뒤의 움직임은 다르다. 전자는 정()을 다르게 부른 것으로, 자기 안으로의 움직임이다. 후자는 그에 대립하는 것으로, 외부와 타자로의 움직임이다. 내부로의 움직임은 그것이 존재하는 이상 반드시 외부로의 움직임을 필요로 한다. 마찬가지로 외부로의 움직임은 내부로의 움직임을 짝으로 삼는다. 그렇지 않고는 자아 따위는 쪼그라들어 점 하나가 되거나 아니면 한껏 팽창해 터져버릴 것이다.

 


 던질 수 있는 질문이 하나 더 생긴다. “그렇다면 두 움직임 중 어느 것이 더 먼저냐하는 질문이다. 나는 뒤의 것, 외부와 타자로의 움직임이 더 본질적인 것이라 생각한다. 움직임은 출발점과 지향점을 함께 가지고 있어야 한다. 자기로부터 타자로의, 내부로부터 외부로의 움직임은 그것을 만족시킨다. 또한 나는 어떤 존재가 일개 점으로 축소되어 자기를 잃어버리려 하는 욕망을 원초적으로 가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남을 향해서 첫 발을 뗀다. 정중동의 본질은 고요가 아니라 움직임이다.

 


 타자를 향한 움직임과 다시 자기 안으로 복귀하는 움직임 사이 영원한 길항과 갈등의 관계, 이것을 나는 주체라고 부르고 싶다. 이 주체는 때로는 생산적이다가 또 폭력적으로 돌변하기도 한다. 효과적으로 다루기를 늘 실패하지만 놓을 수는 없는 야수와도 같다.

 


 그렇다면 동성애자들을 사랑하여 동성애자들을 반대하는 페이지는 어떤가? 이 페이지는 정확히 정중동(=동중동)의 그 논리와 같다. 동성애자라는 타자를 향한 움직임과 그 반대인 자기 복귀가 함께 이루어지는 것으로만 이 페이지의 해괴한 표제를 파악할 수 있다. 여기서 사랑반대이며, ‘반대사랑이 된다.

 


 정중동의 경우에 보았던 순서를 따르자면 어떤 것이 더 먼저인가 하는 질문이 나올 수밖에 없다. 사랑이 먼저인가 반대가 먼저인가. 앞에서 봤던 움직임의 선후 관계를 생각해보자. 타자를 향한 움직임은 자기 안으로의 움직임에 앞선다. 타자의 생성은 주체(라고 최초에 상정되는 것)의 존재를 부정하고 그 비동일성을 확인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렇다면 명백히 사랑과 반대 중 우선하는 것은 반대이다. 그러나 (비기독교인인 내가 생각하기에) 기독교란 사랑의 종교가 아닌가? 그러므로 이 페이지는 기독교인으로서의 자기 동일성을 회복하기 위해 동성애자들을 사랑해야만 한다.

 


 결국 사랑은 사후적으로 생성된다. 비록 이들은 사랑하기 때문에 반대하는 것이라고 스스로 주장하지만 그것은 단지 어순의 선후 관계에 불과하다. 반대하기 때문에 비로소 사랑은 존재할 수 있다. 다르게 말하자면 이들은 반대하기 위해서 사랑을 하는 것이다. 이 페이지는 동성애자들을 반대하는 페이지이지 동성애자들을 사랑하는 페이지가 아니다.

 


 내가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로 생각한다고 말한 것은 결코 비아냥이 아니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 다만 이 사랑이 동성애자들을 사랑하여 동성애자들을 반대하는 페이지와 같은 왜곡된 사랑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페이지만이 아니라 매우 많은 수의 유사-기독교인들이 이와 같은 왜곡된 사랑을 하는데, 이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올바르게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반대를 위한 사랑이 아니라 사랑을 위한 사랑을 할 때, 기독교는 진정으로 세상의 모든 약자들을 위할 수 있을 것이다.


<반지의 제왕>에 대한 소고


 

1. 눈과 절대반지


 

영화 <반지의 제왕>이 가장 공들여 재현한 대상을 이야기한다면, 나는 다른 무엇보다도 모르도르에 있는 사우론의 을 들고 싶다. 파충류의 그것과 비슷한 사우론의 눈은 세상 모든 것을 비출 듯이 부릅뜬 채 결코 감기지 않는다. 영화 내내, 모험가이든 그 적이든 모든 인물들의 뇌리에 이 눈은 파괴적인 공포의 이미지로 남는다. 아마 이 위압감이야말로 제작진이 가장 심혈을 기울여 보여주고자 했던 몇 가지 요소 중 하나였을 것이다.


굳이 엮어보자면 사우론의 눈은 아버지의 눈이라고도 할 수 있다. 자크 라캉은 자신의 성차 공식 중 남성의 공식을 설명하면서, 모든 주체가 거세에 복종하지만 거세에 복종하지 않는 예외적 일자가 있다고 말한다. 이 예외는 프로이트가 신화를 통해 설명한 원초적 아버지이다. 그것은 모든 여자를 품고 주이상스를 누리다 살해당한 최초의 남성이다. 여기서 성애적 요소를 제거하고 막강한 힘을 자랑하고 질서를 구성하다 살해당한 절대자를 이야기할 때 사우론을 떠올리는 것은 어렵지 않다. (나는 톨킨의 세계관에 있는 신성 전쟁의 설정은 일단 무시하고 <반지의 제왕>에 나타난 상징에만 집중하려 한다.)


남성의 공식은 단순히 그런 일자가 존재한다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모든 아들은 아버지의 살해를 통해 비로소 절대적 향유로부터 평등한 결핍을 공유하지만, 동시에 아버지의 주이상스를 꿈꾸는 역설적 존재로 남는다. 영화 속 인물들은 사우론이 불러일으킨 전쟁을 이겨내고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려하면서도 끝없이 사우론의 힘과 권위를 욕망한다. 바로 라캉이 말한 남성의 공식과 같다. 새빨갛게 불타오르는 눈은 잃어버린 최초의 절대적 권위에 대한 모든 인간들의 그리움을 흡수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이 눈알은 현존을 통해 상실을 구체화하는 대상이라고 지젝이 표현한 남근 기표와 가까워진다.


지젝이 남근이라는 절대적 기표를 실재의 효과와 연관해 설명한 것과 달리, 나는 사우론의 눈과 같은 원초적 아버지로서의 남근 기표는 여전히 상징계의 작용으로 남는다고 생각한다. 물론 실재를 강조한 시기부터는 라캉의 사유에서 상징계와 실재계의 엄격한 구분은 불가능하다. 다만 어디까지나 사우론의 눈은 모든 주체들의 욕망을 끌어들이는, 저항할 수 없는 상징 질서이지 그 스스로가 전복의 가능성이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사우론은 자신을 전복할 수단을 만들어낸다. 그것이 바로 절대반지이다. 획득한 자에게 무한한 힘을 가져다준다고 하는 절대반지는 빌보, 프로도, 보르미르, 갈라드리엘, 파라미르와, 그리고 가장 중요한 골룸 등 모든 이들을 끊임없이 유혹한다.


정확히 보자면 절대반지는 그 스스로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지 영화 내에서 잘 보여주지 않는다. 반지가 보여주는 권능은 투명해지는 것과 나이를 먹지 않는 것 두 가지다. 그런데 오히려 투명해지는 능력은 사우론의 부하인 나즈굴이 프로도를 추적하는 데 도움을 준다. 즉 영화 속에서 묘사되는 절대반지는 마땅한 내용이 없는 형식이다. 이런 장치를 설명할 때 지젝이 자주 사용하는 용어가 대상 a’이다. 지젝이 특히 빈번하게 예로 드는 히치콕으로부터 유래한 맥거핀의 전형적인 예가 바로 <반지의 제왕>에서의 절대반지이다. 반지가 무슨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우리는 결코 알 수 없지만 이 반지는 모든 이야기를 이끌어가며, 해석의 중심으로 작용한다. 또한 중간계의 전쟁을 유발하는 신호탄인 동시에 그 상징 질서를 구성하는 교환의 대상이기도 하다.


이것은 한편으로 지젝이 설명하는 이데올로기이기도 하다. 절대반지를 욕망하는 모든 이들은 반지가 실제로 평화를 가져올 능력이나 의지를 가지지 않았으며, 결국 반지의 힘은 타락을 가져온다는 것을 잘 안다. 하지만 반지를 접한 이들은, 벗어나든 벗어나지 못하든, 그것을 향한 욕망 속에서 갈등을 겪는다. 지젝은 이데올로기를 관념 속에서의 무지가 아니라 행동 속에서 알면서도 이루어지는 어떤 것으로 해석한다. 영화 속에서 작동하는 이데올로기가 바로 절대반지이다. 반지는 전쟁이라는 급박한 상황을 현실의 질서로 만들어내는 토대인 환상-구성물이다. 이로 인해 모든 세계를 완전히 파괴하려는 사우론의 의도는 은폐된다. 절대반지는 현실 세계를 벗어난 어떤 도피처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 세계 자체를 은폐물로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지젝이 말한 이데올로기와도 정확히 일치한다.


자본주의가 그 스스로를 붕괴시킬 계급인 프롤레타리아를 만들어낸다는 마르크스의 테제를, 지젝은 라캉이 상징계를 전복할 가능성으로 제시한 대상 a’의 개념을 통해 설명한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자본주의를 구성하는 필수 요소인 동시에 그것을 극복할 가능성이 된다. 절대반지도 이와 마찬가지다. 반지는 중간계의 전쟁과 그 절대적 상징 질서인 사우론 자신을 구성하는 동시에 그것을 파괴할 유일한 수단으로 제시되며, 결국 운명의 산에서 녹아내림으로써 사우론을 죽이고 인간 세계에 평화를 가져온다.


그러나 사실상 프롤레타리아나 실재의 잔재가 각각 어떻게 자본주의와 상징 질서를 무너뜨릴지 우리가 명백하게 알 수 없다는 것을 상기하자면 간단히 녹아내린 반지의 최후는 다소 비현실적이며 순진한 편이다.


 

2. 프로도와 주체


 

<반지의 제왕>은 주인공의 임팩트와 비중이 적은 편이다. 오히려 대국적으로 보자면 여러 왕국과 종족들을 규합하는 간달프나, 왕으로 귀환하는 아라곤이 더 큰 역할을 한다고 볼 수도 있다. 3부작의 매 편마다 마지막 장면은 프로도의 것이기도 했고, 결국 반지를 파괴한 것도 프로도였기에 그를 주인공으로 인정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걸 떠나서 나는 프로도야말로 지젝이 구상해낸 주체를 상징하기 때문에 그에게 주목할 필요를 느낀다.


소위 포스트-구조주의는 주체를 주체화로 환원한다. 실정적인 주체는 존재하지 않으며 주체란 다만 다양한 종류의 권력에 의해 관통된 하나의 효과에 불과하다. 주체는 자기를 인식하거나 자기의 행위를 명료한 주체성을 가지고 파악하는 데에 실패한다. 포스트-구조주의를 비판하는 지젝은 라캉을 따라서 이 주체화의 과정에서 생기는 빈 자리에 주목한다. 라캉은 주체화에 의해서만 자기 안의 내용물을 담을 수 있는 그 빈 상자, 형식으로만 존재하는 어떤 것에서 주체의 가능성을 발견한다. 이 정의는 사실상 실재와 대상 a’에 대한 지젝의 해석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래서 지젝은 실재의 주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이것은 영화 속 프로도의 모습과 유사하다. 프로도는 나약하고 수동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반지와 관련해서는 굳은 의지를 가진다. 물론 그것은 반지에 대한 충동의 결과이지만 달리 말하자면 반지가 곧 프로도인 것이나 마찬가지다. 프로도는 이야기 속에서 반지 운반자라는 형식으로만 존재한다. 오로지 실재의 효과와 관계해서만 의미를 가지는 프로도의 역할은 지젝이 말하는 실재의 주체와 같다.


주체는 결국 표상의 실패와 결여로부터 생긴다. 이 과정은 라캉의 관점에서 볼 때 사후적으로 결정된다. 주체는 자신의 주체성을 파악하는 데에 늘 실패한다. 주체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상징계 너머에 있는 물(Ding)과 향유가 아무 것도 아닌 무()라는 것 그 뿐이다. 이때 주체는 내면의 비어있음을 파악하는 그 순간에 형식으로서 주체라는 의미를 부여 받는다. 이렇듯 주체는 겹겹이 쌓인 역사의 연속선이 아니라 불연속적인 도약 이후 과거에 자신을 위치시킨다.


프로도는 물론 다른 모든 영화 속 등장인물들도 마찬가지다. 간달프와 아라곤 등이 경험한 여러 승리들-헬름 협곡, 아이센가드, 펠레노르 평원에서의-은 사우론과 오르크의 상징 질서에 비하자면 사실상 패배와 별 차이가 없었다. 마지막 전투인 검은문 앞에서의 전투는 사우론의 압도적인 병력 앞에 중간계의 마지막 병력이 궤멸 당할 수밖에 없는 싸움이었다. 오직 절대반지의 파괴만이 승리를 가져올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승리는 영화 속의 여러 승리가 축적된 결과가 아니라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미래에 찾아올 급격한 혁명이었다. 프로도가 운명의 산에서 절대반지를 파괴함으로써 지금까지 원정대가 이루어낸 승리(혹은 패배)는 사후적으로 승리(혹은 패배)가 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프로도 등은 그때 비로소 주체가 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지젝의 주체로 해석한 프로도는 미래의 승리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형식이 된다. 그러나 프로도의 한계는 형식 이상의 것이 되지 못하는 점에 있다. 프로도는 운반자라는 자신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의 성취는 간달프, 아라곤, , 파라미르 같은 우군들 혹은 심지어 적대적인 인물인 골룸 등의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했다. 영화 바깥으로 나와 나를 프로도에 겹쳐보면, 저항할 수 있는 형식으로만 의미가 있는 나의 주체-효과는 나의 의지에 의한 행위와는 무관하다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 아무 생각 없이 살아도 도래할 승리에 의해 나도 혁명 주체가 된다면 누가 혁명가가 될 것인가. 이것은 지젝이 옹호하지는 않을 것 같은, 결정론적인 마르크스주의가 가진 취약점과 맞닿아있다. 즉 혁명은 반드시 일어날 테니 딱히 뭘 의도하지 않아도 된다는 마음 편한 낙관론이다.


 

3. 골룸


 

그래서 이 영화를 보다 급진적으로 읽기 위해서는 모든 논리로부터 빠져나가는 어떤 존재를 발견해야 한다. 그것이 골룸, 스미골이다. 자신을 ‘we’라고 지칭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골룸은 자기 안에 두 가지의 상반된 것이 섞여있는 모순된 존재이다. 골룸 안에는 두 개의 인격이 공존하며, 그는 반지 운반자인 프로도의 부하인 동시에 적이다. 이 기묘한 성격은 영화 안에서 골룸의 정체성이 어디에 있는지를 파악하기 어렵게 만든다.


이렇듯 모순된 존재이면서도 절대반지에 대한 골룸의 태도는 다른 이들이 가지는 양가적인 태도와는 사뭇 다르다. 다른 이들은 반지의 힘에 대한 욕망과 그것이 불러올 파멸을 동시에 인식하기에 조심스러운 반면 골룸에게 반지는 오직 욕망해야만 할 대상이다. 라캉이 말하는 강박증 환자와 비슷하게 골룸은 상징계 속의 불가능한 욕망에 좌초되어 끝없이 자신을 반지와 동일시한다. 그것은 자기 파괴적이지만 골룸에게는 그 자체가 윤리이자 행복이다.


프로도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주체인 다른 인물들과 달리 골룸은 대상을 향한 무차별적 욕망과 절대적 향유를 꿈꾸는 상징계 속의 이단아에 가깝다. 그는 관념으로도 행동으로도 이데올로기를 알지 못한 채 움직인다. 이런 점에서 봤을 때 골룸은 오히려 지젝이 다소간 비판한 알튀세르적 주체, 절대반지라는 이데올로기에 의해 호명된 주체에 가깝다. 반지가 파괴되기 이전부터 골룸은 자신의 의도적인 행위에 대해 전적인 책임을 지는, 분명한 주체이다. 절대반지가 가진 반대편의 의미-사우론과 그의 절대적 힘의 영원한 파괴-를 모르는 상징계 속의 결여된 주체에 불과하기는 하지만, 결국 그의 주체성덕분에 혁명은 가능해지고 (그를 제외한) 모두는 주체가 된다. 여기에서 혹시 지젝이 빠뜨린 어떤 것, 의도적인 주체성의 유용함을 찾는 것은 다소 지나칠까?

 

 


나는 지젝의 숱한 논의들 중 도래할 혁명, 미래완료의 시제로 제시될 혁명이라는 개념에 동의한다. 혁명은 그것이 완성되고 나서야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자신의 조건을 제시할 것이다. 그러나 혁명이라는 결과만으로 나의 주체가 성립된다면, 내가 무엇에 저항하는 시도는 내용이 갖추어지지 않은 텅 빈 형식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혁명가의 의지가 없는 혁명을 나로서는 상상하기가 어렵다. <반지의 제왕>의 프로도는 바로 그런 주체성을 잘 보여주는 존재다. 반지를 떼어놓고서는 그의 정체성을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소 저돌적인 투사를 필요로 할 수도 있다. 그것은 이 영화 안에서는 골룸이다. 상징계의 논리 안에서만 욕망하고 행동하는 주체를 상징하는 골룸은 결국 그 상징계의 전복을 가져온다. 나는 그를 지젝이 설명한 것과 같이 내용을 갖지 않은 형식적인 주체라든지 사후적으로 생성되는 주체가 아닌, 알튀세르 식의 호명된 주체로 해석하고 싶다. 반지 운반자로서 형식적 주체인 프로도와, 오랜 시간 동안 반지를 소유했던 자로서 상징계 안의 결여된 주체인 골룸은 서로에게 있어 일종의 분신(分身)이다. 프로도가 사후적으로 역할을 부여받기 위해서는 상징계 속에서 독립적인 기표로서 골룸이 필요하다. 반대로 골룸이 자기 주체성을 갖는 것은 이후의 혁명을 통해 프로도라는 주체가 서기 위해 자신의 임무를 다하는 한에서이다. (그래서 골룸은 마지막에 가서 죽을 수밖에 없다. 사우론의 세계 정복은 거기서 막을 내리니까.)


지젝도 물론 행위의 중요성을 여러 차례 강조하며, 특히 안티고네에 대한 비유를 통해 급진적인 행위의 창발성을 중요시 여겼다. 그러나 반역자를 매장하는 안티고네의 행위도 결국 상징계에 구멍을 내기 위한 행위라는 점에서 실재의 주체에 의한 행위이며 비의도적인 우발성에 기대는 것이다. 지젝을 더 급진적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그가 뛰어나게 논증해놓은 실재의 주체 논리만으로는 부족하다. 새가 두 날개로 날 듯이, 그가 만든 왼쪽 주체에는 의도와 목적성을 완전히 지우지는 않은 오른쪽 주체가 필요할 것이다.



성스러운 테러 - 테리 이글턴 (2007)



  신성함과 테러(terror)가 한데 어우러질 수 있을까? 엘리아데는 일찍이 성()에서 속()이 나뉘면서 종교가 탄생했다고 말했다. 이 분리를 잡아낸 것은 탁월한 통찰력의 결과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엘리아데의 이론 속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이 둘의 구분이 아니다. 종교의 탄생 이전에 존재했던, 단일한 총체성을 주장했다는 것이 핵심이다. 김태곤은 엘리아데의 종교 이론을 뒤집어 미분화된 최초를 무(), 다르게는 카오스적인 원본으로 설명했다. 성으로부터 속이 유래했다는 엘리아데와, 코스모스가 카오스로 회귀하려 한다는 김태곤 둘 모두에게 본질적으로 성과 속은 하나이다.

 


  인간의 본질을 이렇게 하나의 속성으로 설명하는 시도는, 내가 보기에는, 역시나 종교적인 직관에서 나온 것이리라 생각된다. 그리고 이것은 현실 세계를 설명하기에 다소 무리가 따른다. 인간의 본성이 성이든 속이든 하나로 통합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위험하다. 인간의 언어와 의식이 중층적이며 혼재되어 있다는 것을 지금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다양한 사회적 기구, 장치들도 마찬가지다. 가령 국가의 설립이 처음부터 질서와 폭력 중 어느 것에 기초했는지 파악하려 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둘 모두에 기초했으니까.

 


  그렇다면 카오스와 코스모스의 관계는 무엇인가? 테리 이글턴의 저작 <성스러운 테러>는 약간 다른 맥락과 인용들을 통해서 이것을 설명하려 한다. (물론 성과 속, 카오스와 코스모스, 선과 악, 질서와 혼돈, 이 모든 것이 등가를 이룬다는 식의 주장은 위험하며, 내가 연결하는 것의 엄밀함을 흐린다는 것은 인정한다.) 마르크스주의에 다양한 현대 문예이론을 비판적으로 수용했던 그답게 이 책 또한 지라르의 희생양부터 정신분석학과 라캉의 욕망 이론,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와 지젝에 이르는 다양한 사유들을 빌려 성스러움테러라는 이중적인 요소의 결합을 말한다.

 



  이글턴은 에우리피데스의 희곡 속 디오니소스와 펜테우스의 관계를 통해 혼돈과 질서가 혼재된 양상을 설명하고, 질서가 주가 되어 반대 측면을 배제하는 메커니즘을 해석해낸다. 이글턴의 논지는 간단하다. 문명과 역사는 언제나 파괴적인 힘의 기반 위에 그 힘을 억압하며 정립한다. 억압의 기제는 언제나 자기 안에 억압하는 대상을 감추게 된다. 이것이 프로이트가 말하는 죽음충동’, 라캉이 말하는 실재의 효과다. 문명은 폭력을 배제하려 하지만, 오히려 그로 인해 질서는 광기의 복수를 맞이한다. 이글턴은 광기를 인정할 수 있는 것은 정신의 명료함인 반면 광기를 이성의 힘 아래 모두 굴복시킬 수 있다고 상상하는 것은 망상”(p.28)이라고 말한다.

 


  이글턴은 이렇게 체계를 이성과 비이성의 혼재로 설명하는 것을 근대적 사유의 다양한 개념들에 적용한다. 가령 근대성이 인간의 개별적 차이를 가르는 것을 펜테우스의 이성에 빗댄다. 반면 그것을 복구하기 위해 개별적 차이를 지우고 인간을 신체로만 다루는 전체주의의 모습을 디오니소스에 비유한다. 사회적인 것의 체계는 이 두 가지의 모순적인 결합이거나 어느 한 쪽이 다른 쪽을 배제하려는 움직임으로 규정된다. 또한 중세 기독교에서 논의된 하나님과 예수의 사랑, 에드문드 버크의 숭고 개념, 헤겔이 경계하면서도 그 힘을 인정한 절대 자유 개념에 모두 질서-혼돈의 중층적 혼재를 적용한다.

 


  이론적인 측면에서 이 책의 논리는 위에도 말한 지라르와 라캉의 공식에 상당 부분 의존한다. 그렇기에 어느 정도 이미 규명된 메커니즘을 재탕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이글턴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그 해결책을 모색한다. 아니, 모색이라기보다는 넌지시 던지는 것에 가깝다.



 

  이글턴의 첫 번째 방안은 숭고를 사회적으로 담아내는 것이다. 이것은 근대성과 탈근대성의 지난 대립을 종언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근대성은 필연적으로 총체성을 상실한 개별적 자아들의 세계를 구성한다. 반대로 탈근대성은 자아를 포기하고 유희하며 자연과의 새로운 결합을 촉구한다. 이글턴은 자연과 인간의 분리는 역사 형성의 전제조건으로, 그 이성의 역할은 쓸모없지 않다고 주장한다. 동시에 디오니소스적인 것이 가지는 폭력성과 동물적인 것의 힘을 완전히 사회에서 배제하려는 시도는 파멸로 귀결된다. 종말을 피하기 위해 고대 그리스에서는 디오니소스 숭배의 사회적 인정”(p.47)을 통해서 양자를 융합하려 했다. 그 현대적인 방식은 아마도 예술이 될 것이다.

 


  버크가 정치의 양성성을 강조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에 자리한다. 버크는 생산과 파괴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예술적 경험을 숭고라는 개념을 통해 설명하는데, 이것은 현실 세계에서는 끔찍한 공포만을 낳는다. 파괴적인 나쁜 숭고를 극복하기 위해 버크는 좋은 숭고를 필요로 한다. 그것은 공포를 내포한 평온함”(p.95), 결국 아폴론(펜테우스)와 디오니소스 사이의 균형이다. 이 균형은 근대적 사유와 탈근대적 도전 사이의 묘한 합의점을 시사한다. 이런 절충주의, 현실주의적인 시도는 결코 이런 방식이 아니면 설명하거나 돌파할 수 없는 현대의 난제들을 대할 때 유일하게 적합한 태도다.

 


  돌파를 위한 이론적 도구가 명확하게 제시된 것은 아니지만, 이글턴은 몇 가지 힌트를 제공한다. 예를 들면 아가페(agape)와 그리스도에 관한 해석이다. 라캉이 만들고 그 후계자들이 정식화한 이론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차용하면, 결국 개인은 빠져나올 수 없는 폭력적인 상징 구조에 갇히고 만다. (라캉주의자들은 이를 실재계를 통해 해소하려고 했지만) 이글턴은 성스러움의 억압적 상징질서를 깨뜨리는 것은 그리스도라고 주장한다. 그리스도는 가족적 질서의 해체를 명령한다. 그리스도는 어떤 결핍도 욕망도 모르는 타자로서 다른 이들에게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p.64)기 때문에 라캉적인 대타자의 개념을 해체해버린다. 그는 상징질서를 요구하지 않는, 목적 없는 타자이다. 대타자를 넘어서는 또 다른 타자, 그의 등장으로 인해 인간의 존재 의의는 법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법을 벗어나는 것이 된다. 그러면 이 위반의 형식이 어떤 식으로 성과 속의 대립을 깨고 둘을 올바르게 정립할 수 있을까? 이 책에서 이글턴의 사유는 그리 세밀하지 않기에 대답은 미루어진다.


 

  여기까지 읽다보면 머리가 갸우뚱할 수 있다. 이글턴이 권력을 사유하는 방식은 분명 권능한 지도자의 위치에서나 말할 수 있는 것들에 가깝다. 사회적으로 담아내는 것과 권력의 양성성을 말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엘리트주의적인 해결책이다. 혹은 최소한 저항과는 다소 거리가 멀다고, 그러니 약자의 방법론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이글턴 자신도 이에 대한 완벽한 대답은 내놓지 못하지만, 책의 말미에서 자신의 본래 종목인 문학 비평을 통해 두 번째 길을 제시한다.

 


  두 번째 방법 또한 상징 질서에 균열을 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차이점은 보다 선명하게 억압된 자들의 목소리에 기댄다는 것이다. 여기서 이글턴이 강조하는 단어는 희생이다. 이글턴이 말한 바와 같이 희생은 우리 시대에 상당히 역겨운 단어로 취급받는다. 이글턴은 그 폭력적인 배제의 메커니즘을 일일이 설명하지는 않는다. 이미 충분히 알려져 있는 것을 다시 설명하기보다 그 기능에 주목한다. “무고한 범법자”(p.230)라고 그가 이름 붙인 희생양들은 두 가지 측면에서 사회질서의 초석”(p.225)이 된다.

 


  첫 번째로 희생자들은 그들을 버린 사회와 유사성을 가진다. “우리 자신의 심연과 너무 가깝고 친밀한”(p.225) 희생양들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기형성에 눈을 뜨”(p.226)게 하고, 자기 안의 비인간성과 대면할 기회를 제공한다. 우리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희생자의 무고함을 통해 폭력은 일반적 상황으로서 구조적으로 그 안에 각인”(p.230)됨이 드러난다. 이로 인해 사회는 스스로의 죄를 마주한다. 자신 안의 혼돈을 몰아내기 위한 배제의 전략을 통해 그들이 누군가를 희생시켰다는 씻을 수 없는 죄이다. 여기서 희생양은 일종의 카메라가 되어 아주 무심하게 그들이 무고하게 희생된 과정을 보여준다.

 


  그런데 희생양이 사회에 성찰을 가져다준다는 것은 또 어쨌든 희생양을 타자화한 사회의 시각을 통해 이루어지는 과정이지 않은가? 이글턴은 맨 마지막에 가서야 이에 대한 나름의 해답을 내놓기 위해 문학 비평을 활용한다. 아마도 이글턴이 정말 고심하고 고심해서 골라냈을 작품은 새뮤얼 리처드슨의 <클라리사>이다. 이글턴은 주인공인 클라리사에 대해 기존에 가해졌던 다소 악의적인 비평들을 전적이지는 않지만 거부한다. 클라리사가 신경증적, 가학적이며 삶보다 정절이라는 가부장적 가치를 옹호한다는 비판들이다. 이글턴은 그녀가 새디스틱하게 자신의 죽음을 공론화하는 것은 합당한 가학성을 발휘”(p.235)하여 희생자의 무력함이 권력으로 변화”(p.235)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라 말한다. “그녀는 정체성을 파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수호하기 위해 죽음을 선택한다.”(p.237) 클라리사는 무의미하게 목숨을 잃은 것이 아니라, 상징 질서에 균열을 가하기 위해 스스로 몸을 던진 것이다.


 

  강간이라고 하는, 가장 폭력적인 방식으로 가장 철저히 대상화를 당하는 경험을 겪은 이가 의지적으로 혹은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의 방향성을 급전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만일 다른 누구에 의해 그녀에게 가해진 폭력성이 폭로당한 것이라면, 이는 또 다른 방식의 대상화에 불과하다. 그러나 스스로 죽음의 길을 택하면서, 클라리사는 자기 주체를 보다 공고히 한다. 여기서 이글턴이 앞서 말한, 그리스도적인 타자가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닐까? 결핍도 욕망도 없는 순수한 타자, 상징 질서의 메커니즘에서 벗어나 그것을 깨뜨리기 위해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타자로 클라리사를 독해할 수 있지 않을까? 이 부분은 보다 명료한 분석이 필요하다.

 


  분명한 것은 클라리사는 상징 질서로부터 배제되며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오이디푸스에게도, 성스러운 테러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희생양은 사회에서 배제된 악 그 자체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들은 악의 배제라는 현상을 통해 생성된다. 클라리사는 존엄을 유린당하고 대상화된 자신이 사회로부터 배제당하는 순간, 가부장의 질서에 무릎을 꿇은 기존의 여성으로부터, 새로운 주체로 변한다. 오이디푸스는 장님이 되어 추방당하면서, 죽음 속에 삶을 품은, 저주 받았으면서도 거룩한 존재가 된다. 이렇게 희생양이 생성되는 것이라면, 물 밑에는 숭고한 존재로 거듭나지 못한 이들도 있을 것이다. 모든 배제가 무고한 범법자를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니까.

 



  그렇다면 <성스러운 테러>에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희생양이 되어라!’ 그런데 이 문장은 명령문이기는 하지만 두 가지로 해석이 가능하다. 우선 화자가(즉 여기서는 사회와 문명이) 희생양이라고 그를 칭한다는 점에서, 배제된 이를 희생양으로 만들어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른 한 편으로는, 화자가 행위를 명령한다는 점에서, 배제된 이가 스스로 희생양으로 거듭나라고 권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당연히 후자의 경우만이 진정 정당하다는 것은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모든 배제가 숭고한 희생양을 호명하지는 못하기에, 그들은 스스로가 스스로를 만들어내야 한다. 그것은 어찌 보면 운에 기대야 하는 일일 수도 있다. ‘배제의 메커니즘 속에서 아주 우연히, 개인사에 의해서, 교육과 환경을 통해, 그러나 무엇보다도 자기의 의지에 따라 희생양은 만들어지고 제 목소리를 낼 것이다.

 


  나는 실재계와 같은 개념을 통해 이를 설명하기보다는, 그러니까 배제된 희생양이 점하는 위치에 주목하기보다는, 배제 행위 자체에 방점을 찍고 싶다. 주체는 행위에 의해 만들어진다. 행위보다 앞서 자리하는 위치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의 위상학을 규명할 방법도 없다. 배제라는 행위를 통해, 버림받은 이들은 스스로를 희생양으로 만든다. 거기서 우리는 죽음 속에 삶을 품은 숭고를 스치듯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죽음을 뒤집어쓰고 기표로 변해버린 이들에게 주체를 되찾아주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실천의 최선책이다. 그리고 그것이 물이 끓듯이 계속 일어나도록 격려하는 사회야말로 우리가 추구해야할 이상향이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뒤따를 변화 이전에 있어야 할 진짜변화다.

 


  비정규직이, 장애인이, 여성과 성소수자가, 지구 생태가, 제국 식민지가, 그리고 극단적으로는 테러리스트들에 이르기까지, 스피박의 표현 그대로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진짜 변화이며 해방은 여기서 시작된다. 이 변화야말로 가장 지난한 길이다. 그 첫걸음은 무섭도록 냉정한 자기비판, 그러니까 이글턴이 이 책 전체에서 그토록 멱살 잡고 강요하는, 숭고함에 대한 인정이기 때문이다. 내 안에 이성과 광기가 동시에 있으며, 광기를 몰아내고자 하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지를 깨닫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동시에, 결코 피할 수 없는 숙적이리라.


그 여자의 침대 - 박현욱(2008)





  문학은 늘 스스로의 문학적 에너지를 바깥으로 방출하거나 안으로 고착한다. 서사문학도 마찬가지라 여러 소설들은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와 플로베르의 <감정교육> 사이에 서서 그때마다 어느 한 쪽의 경향을 택한다. 작품집 전반을 두고 말하자면, <그 여자의 침대>는 서사의 에너지를 내면에 고정하는 이야기를 추구한다. 소설이 전개되는 방향은 바깥을 향하지 않고 서서히 내면에 침착(沈着)한다.


박현욱이 이러한 서사의 침착을 위해 선택한 방식은 크게 두 가지다. 첫번째는 서사의 소재 측면에서 각각의 인물들이 갖는 삶의 파편성을 통해 서서히 가라앉는 내면 의식을 드러내는 것이다. 다른 하나의 전략은 과거 회상의 기법이나 삶과 인물 사이의 거리감 등을 통해 인물들이 내면에 머무를 수밖에 없도록 하는 측면에서 이루어진다.

  박현욱의 작품들 전반에 드러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작품집 역시 키치적인 감각을 기반으로 하여 일상적이고 다양한 삶으로부터 여러 소재를 끌어들이고 있다. 그 중에는 잡다한 지식과 삶의 모습이 집중적으로 드러난 작품이 있다. <이무기>에서는 마지막 기회를 잡은 프로 기사 지망생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으며, <그 사이>에서는 한 남자의 효율적인 다이어트 과정이 주된 소재로 사용된다. 이러한 작품들 외의 다른 작품들에서도 박현욱은 소재 혹은 인물 중 하나를 개성적인 삶의 장() 안에 넣고 있다. 표제작인 <그 여자의 침대>는 침대의 사이즈라고 하는 사소하면서도 독특한 소재를 활용하고 있으며, <연체>에서는 교수 임용에서 번번이 탈락하는 사회학자의 삶의 모습과 태도를 연체된 책이라는 소재를 통해 부각하고 있다. 이렇듯 박현욱의 소설은 다루는 서사의 장 자체가 넓다.

  그러나 넓은 것은 장뿐이다. 작가가 공들여 만들어놓은 개성적인 장 안에서 드러나는 인물들의 태도는 그 소재가 갖는 파편적 성격, 혹은 인물의 단조로운 삶의 군상에 침착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가령 <그 여자의 침대>에서 여자는 결국 더블침대가 아닌 슈퍼싱글 사이즈를 선택한다. 자신의 내면이 원하는 침대의 여분과 타자가 원하는 침대의 여분 사이에서 내면을 선택하는 것이다. <생명의 전화>에서 또한 주인공은 파니와의 마지막 통화를 잇지 못한다. 전화를 먼저 끊은 것은 파니이지만 그 관계를 끊는 것은 둘 모두의 의지였을 것이다. <그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로, 주인공은 두 번의 이혼의 고통을 금연과 다이어트로 각각 전이하여 견뎌내려 하지만 이 과정은 극복이 아닌 자기 침잠일 뿐이다.

  작품들에서 서사를 이끌어가는 주요한 소재들은 단순히 이야기의 화두를 던지고 인과관계를 설정하는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그 여자의 침대>침대 사이즈의 여분은 내면과 타자가 만나는 교집합의 공간을 상징한다. <생명의 전화>에서 파니와의 채팅이나 전화, 섹스 따위는 가벼운 주체와 가벼운 주체가 만나 이루어지는 가벼운 만남이다. <연체>의 주인공은 장기 연체된 책에다가 과거의 이혼이 준 상처를 오롯이 포장해 박스 안에 넣어 치워둔 꼴이 된다. 이 모든 소재들은 타자와의 접점에서 발생하는, 발생할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마찰을 자신의 애써 부인하고 미뤄두고 자신의 내면으로 침착하려는 에너지의 방향성을 가진다.

  물론 소재나 삶의 장과는 별개로 서사의 흐름과 인물의 태도는 외부를 향할 수도 있는 법이다. 그럼에도 작품집 내내 박현욱은 이미 내면을 향하고 있는 소재들의 화살표를 돌릴 생각 따위는 하지 않는다.

  그 장치로 사용되는 것 중 하나는 과거 회상의 기법이다. <>K와의 대화 중 자신의 과거 이야기들을 터놓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이무기> 또한 한 판의 바둑과 주인공의 과거의 모습이 번갈아 나타난다. <생명의 전화><연체>, <그 사이>에도 과거의 회상은 현재의 이야기 이상으로 주요한 서사 방식이다. 또한 어린아이의 목소리를 빌린 <해피버스데이> 역시 일종의 어린아이 시절에 대한 회상으로 이해할 수 있다.

  회상은 과거를 대상으로 삼는다. 그러나 과거 사실은 언제나 과거 사실에 대한 사실이 된다. 기억과 회상은 현재 자신의 머릿속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개인의 회상, 즉 개인사()는 해석으로서의 개인사이고 그 실체는 없다. 따라서 과거 회상이라는 기법은 그 해석의 내면성이라는 성격상 자연스럽게 내면에 머무르는 이야기의 흐름을 낳는다. 또한 그 개인사를 듣는 자아와 타자는 그 해석이 엇갈리게 된다. 과거 회상은 본질적으로 공감이 불가능한 하나의 텍스트가 된다.

  가령 <>의 주인공은 내내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지만, K는 절반 정도는 공감하는 듯이 보이면서도 주인공의 내면과 다른 해석을 연달아 내놓는다. 마지막에 가서 주인공은 ‘9번 교향곡을 찾지 못했고 K는 테이프를 다시 꺼낸다. 공감의 불가능과는 다른 차원에서 내면화되는 과거 회상도 있다. “지나간 일들을 자꾸 생각하는 건 나이가 들어간다는 징조라면서도 사회학 공부를 한 것과 이혼 경력을 돌이켜보며 회한을 느끼고 과거(장기연체된 책)를 내면(박스)에 자꾸만 가두어두는 <연체>의 주인공이 그러하다. 더블베드에 누울 때마다 이혼 경력을 떠올리게 되고, 그것이 싫어 작은 침대를 선택하는 <그 여자의 침대>의 여자도 마찬가지다.

  과거 회상의 서사가 과거를 내면에 머무르게 하는 것이라면, 자신의 삶으로부터 큰 거리감을 두고 그 삶을 이야기하는 서술 방식은 현재를 내면에 가두는 전략이다.

  작품집의 인물들에게 보이는 가장 흔한 삶의 배경은 이혼 경력이다. 그것이 실패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결혼과 이혼은 여러모로 간단한 문제가 아니고, 그만큼 스스로의 삶을 성찰하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이들의 경우 삶을 대하는 태도는 철저히 회의적이다. 이런 회의적인 인물상은, 애인이라는 관계는 언제든 간단하게 끝날 수 있음을알고 있는 <그 여자의 침대>의 여자부터, 왜 같이 사느냐는 물음의 대답을 끝내 하지 못한 <생명의 전화>의 주인공과, 연달아 일어나는 불행을 불가피한 비극으로 인식하는 <그 사이>의 주인공에 이른다. 이들은 타자와의 관계와 감정, 심지어 자신의 삶에 대해서도 거리감을 두며 내면으로 도피한다.

  이혼남/녀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인물들은, 심지어 아직 초등학생인 주인공까지도, 결국 내면적 방향의 소재로부터 시작해 내면적 방향의 선택으로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다. 내면과 타자의 접점 속에서 발생하는 피할 수 없는 갈등과 모순, 그 뻔해 보이는 이야기의 가장 현대적이고 일반적인 선택지가 내면으로의 침착일 수도 있다. 바깥을 향해, 타자를 향해, 아무리 손을 뻗어도 닿을 수 없기에.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자면, 얼마나 뻔한 서사인가? 이 내면으로의 방향성은. 또 얼마나 무의미한가? 이 파편의 시대에 있어서, 이 소통의 불가능성이라는 메시지는. 작품집 전반에서 느껴지는 다소 불쾌한 감각은 여기서 비롯되는 것일 수도 있다. 또 다양한 소재라는 성과는 얻었으나 그 소재를 작품의 메시지와 효과적으로 연결하지는 못한 <이무기><해피버스데이> 같은 작품에서는 형상과 의미의 사이에서 균형을 잃었다는 느낌도 들었다.

  이런 관점에서 <링 마이 벨><그 사이>, 이것이 작품집 전체의 작품들 중 뒤의 시기에 발표된 것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가장 큰 극복이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링 마이 벨>의 주인공은 어느 순간 가슴속에서 솟구치는그 무언가의 짧은 끈을 잡고 결혼을 하고서 아파트, 티브이, 자동차에 대한 속물적인 주제로 아내와 싸우고서도 뎅그렁하는 종소리를 듣게 된다. <그 사이>의 주인공은 금연과 다이어트로 타자와의 갈등을 내면에 가두는 것으로 일관하지만, 한편으로는 집 나간 아내를 끈질기게 찾고 마지막 순간에도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진다. 진심을 담아 사과를 한다.

  결혼 생활에 회의를 느끼면서도 때려치우지 못하고(<링 마이 벨>), 업자까지 써가며 아내의 이메일을 훔쳐보다가 나중에는 자존심까지 버리고 사과하는(<그 사이>) 모습은 결코 멋있지 않다. 삶은 본래 그렇게 멋있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부부 싸움을 하다가 도저히 못 이기겠으니 집을 나가버리는 것이나, 자신의 잘못인지 아닌지도 모를 일 때문에 이혼을 요구하는 아내에게 자존심도 뭐도 다 버리고 사과하는 것이나, 어찌 보면 찌질하고 한심해 보이는 일이다.

  어쩌면 그 찌질과 한심이 공감의 본질은 아닐까. 이마에 주름 딱 잡고 인상 팍 쓰고 삶을 회의감으로 마주하며 내면에 가라앉는 이야기가 죽 이어지다가 갑자기 등장하는, 이 멋없는 공감의 이야기가 작품집에서 건질 수 있는 특별한 보물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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