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지의 제왕>에 대한 소고


 

1. 눈과 절대반지


 

영화 <반지의 제왕>이 가장 공들여 재현한 대상을 이야기한다면, 나는 다른 무엇보다도 모르도르에 있는 사우론의 을 들고 싶다. 파충류의 그것과 비슷한 사우론의 눈은 세상 모든 것을 비출 듯이 부릅뜬 채 결코 감기지 않는다. 영화 내내, 모험가이든 그 적이든 모든 인물들의 뇌리에 이 눈은 파괴적인 공포의 이미지로 남는다. 아마 이 위압감이야말로 제작진이 가장 심혈을 기울여 보여주고자 했던 몇 가지 요소 중 하나였을 것이다.


굳이 엮어보자면 사우론의 눈은 아버지의 눈이라고도 할 수 있다. 자크 라캉은 자신의 성차 공식 중 남성의 공식을 설명하면서, 모든 주체가 거세에 복종하지만 거세에 복종하지 않는 예외적 일자가 있다고 말한다. 이 예외는 프로이트가 신화를 통해 설명한 원초적 아버지이다. 그것은 모든 여자를 품고 주이상스를 누리다 살해당한 최초의 남성이다. 여기서 성애적 요소를 제거하고 막강한 힘을 자랑하고 질서를 구성하다 살해당한 절대자를 이야기할 때 사우론을 떠올리는 것은 어렵지 않다. (나는 톨킨의 세계관에 있는 신성 전쟁의 설정은 일단 무시하고 <반지의 제왕>에 나타난 상징에만 집중하려 한다.)


남성의 공식은 단순히 그런 일자가 존재한다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모든 아들은 아버지의 살해를 통해 비로소 절대적 향유로부터 평등한 결핍을 공유하지만, 동시에 아버지의 주이상스를 꿈꾸는 역설적 존재로 남는다. 영화 속 인물들은 사우론이 불러일으킨 전쟁을 이겨내고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려하면서도 끝없이 사우론의 힘과 권위를 욕망한다. 바로 라캉이 말한 남성의 공식과 같다. 새빨갛게 불타오르는 눈은 잃어버린 최초의 절대적 권위에 대한 모든 인간들의 그리움을 흡수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이 눈알은 현존을 통해 상실을 구체화하는 대상이라고 지젝이 표현한 남근 기표와 가까워진다.


지젝이 남근이라는 절대적 기표를 실재의 효과와 연관해 설명한 것과 달리, 나는 사우론의 눈과 같은 원초적 아버지로서의 남근 기표는 여전히 상징계의 작용으로 남는다고 생각한다. 물론 실재를 강조한 시기부터는 라캉의 사유에서 상징계와 실재계의 엄격한 구분은 불가능하다. 다만 어디까지나 사우론의 눈은 모든 주체들의 욕망을 끌어들이는, 저항할 수 없는 상징 질서이지 그 스스로가 전복의 가능성이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사우론은 자신을 전복할 수단을 만들어낸다. 그것이 바로 절대반지이다. 획득한 자에게 무한한 힘을 가져다준다고 하는 절대반지는 빌보, 프로도, 보르미르, 갈라드리엘, 파라미르와, 그리고 가장 중요한 골룸 등 모든 이들을 끊임없이 유혹한다.


정확히 보자면 절대반지는 그 스스로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지 영화 내에서 잘 보여주지 않는다. 반지가 보여주는 권능은 투명해지는 것과 나이를 먹지 않는 것 두 가지다. 그런데 오히려 투명해지는 능력은 사우론의 부하인 나즈굴이 프로도를 추적하는 데 도움을 준다. 즉 영화 속에서 묘사되는 절대반지는 마땅한 내용이 없는 형식이다. 이런 장치를 설명할 때 지젝이 자주 사용하는 용어가 대상 a’이다. 지젝이 특히 빈번하게 예로 드는 히치콕으로부터 유래한 맥거핀의 전형적인 예가 바로 <반지의 제왕>에서의 절대반지이다. 반지가 무슨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우리는 결코 알 수 없지만 이 반지는 모든 이야기를 이끌어가며, 해석의 중심으로 작용한다. 또한 중간계의 전쟁을 유발하는 신호탄인 동시에 그 상징 질서를 구성하는 교환의 대상이기도 하다.


이것은 한편으로 지젝이 설명하는 이데올로기이기도 하다. 절대반지를 욕망하는 모든 이들은 반지가 실제로 평화를 가져올 능력이나 의지를 가지지 않았으며, 결국 반지의 힘은 타락을 가져온다는 것을 잘 안다. 하지만 반지를 접한 이들은, 벗어나든 벗어나지 못하든, 그것을 향한 욕망 속에서 갈등을 겪는다. 지젝은 이데올로기를 관념 속에서의 무지가 아니라 행동 속에서 알면서도 이루어지는 어떤 것으로 해석한다. 영화 속에서 작동하는 이데올로기가 바로 절대반지이다. 반지는 전쟁이라는 급박한 상황을 현실의 질서로 만들어내는 토대인 환상-구성물이다. 이로 인해 모든 세계를 완전히 파괴하려는 사우론의 의도는 은폐된다. 절대반지는 현실 세계를 벗어난 어떤 도피처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 세계 자체를 은폐물로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지젝이 말한 이데올로기와도 정확히 일치한다.


자본주의가 그 스스로를 붕괴시킬 계급인 프롤레타리아를 만들어낸다는 마르크스의 테제를, 지젝은 라캉이 상징계를 전복할 가능성으로 제시한 대상 a’의 개념을 통해 설명한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자본주의를 구성하는 필수 요소인 동시에 그것을 극복할 가능성이 된다. 절대반지도 이와 마찬가지다. 반지는 중간계의 전쟁과 그 절대적 상징 질서인 사우론 자신을 구성하는 동시에 그것을 파괴할 유일한 수단으로 제시되며, 결국 운명의 산에서 녹아내림으로써 사우론을 죽이고 인간 세계에 평화를 가져온다.


그러나 사실상 프롤레타리아나 실재의 잔재가 각각 어떻게 자본주의와 상징 질서를 무너뜨릴지 우리가 명백하게 알 수 없다는 것을 상기하자면 간단히 녹아내린 반지의 최후는 다소 비현실적이며 순진한 편이다.


 

2. 프로도와 주체


 

<반지의 제왕>은 주인공의 임팩트와 비중이 적은 편이다. 오히려 대국적으로 보자면 여러 왕국과 종족들을 규합하는 간달프나, 왕으로 귀환하는 아라곤이 더 큰 역할을 한다고 볼 수도 있다. 3부작의 매 편마다 마지막 장면은 프로도의 것이기도 했고, 결국 반지를 파괴한 것도 프로도였기에 그를 주인공으로 인정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걸 떠나서 나는 프로도야말로 지젝이 구상해낸 주체를 상징하기 때문에 그에게 주목할 필요를 느낀다.


소위 포스트-구조주의는 주체를 주체화로 환원한다. 실정적인 주체는 존재하지 않으며 주체란 다만 다양한 종류의 권력에 의해 관통된 하나의 효과에 불과하다. 주체는 자기를 인식하거나 자기의 행위를 명료한 주체성을 가지고 파악하는 데에 실패한다. 포스트-구조주의를 비판하는 지젝은 라캉을 따라서 이 주체화의 과정에서 생기는 빈 자리에 주목한다. 라캉은 주체화에 의해서만 자기 안의 내용물을 담을 수 있는 그 빈 상자, 형식으로만 존재하는 어떤 것에서 주체의 가능성을 발견한다. 이 정의는 사실상 실재와 대상 a’에 대한 지젝의 해석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래서 지젝은 실재의 주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이것은 영화 속 프로도의 모습과 유사하다. 프로도는 나약하고 수동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반지와 관련해서는 굳은 의지를 가진다. 물론 그것은 반지에 대한 충동의 결과이지만 달리 말하자면 반지가 곧 프로도인 것이나 마찬가지다. 프로도는 이야기 속에서 반지 운반자라는 형식으로만 존재한다. 오로지 실재의 효과와 관계해서만 의미를 가지는 프로도의 역할은 지젝이 말하는 실재의 주체와 같다.


주체는 결국 표상의 실패와 결여로부터 생긴다. 이 과정은 라캉의 관점에서 볼 때 사후적으로 결정된다. 주체는 자신의 주체성을 파악하는 데에 늘 실패한다. 주체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상징계 너머에 있는 물(Ding)과 향유가 아무 것도 아닌 무()라는 것 그 뿐이다. 이때 주체는 내면의 비어있음을 파악하는 그 순간에 형식으로서 주체라는 의미를 부여 받는다. 이렇듯 주체는 겹겹이 쌓인 역사의 연속선이 아니라 불연속적인 도약 이후 과거에 자신을 위치시킨다.


프로도는 물론 다른 모든 영화 속 등장인물들도 마찬가지다. 간달프와 아라곤 등이 경험한 여러 승리들-헬름 협곡, 아이센가드, 펠레노르 평원에서의-은 사우론과 오르크의 상징 질서에 비하자면 사실상 패배와 별 차이가 없었다. 마지막 전투인 검은문 앞에서의 전투는 사우론의 압도적인 병력 앞에 중간계의 마지막 병력이 궤멸 당할 수밖에 없는 싸움이었다. 오직 절대반지의 파괴만이 승리를 가져올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승리는 영화 속의 여러 승리가 축적된 결과가 아니라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미래에 찾아올 급격한 혁명이었다. 프로도가 운명의 산에서 절대반지를 파괴함으로써 지금까지 원정대가 이루어낸 승리(혹은 패배)는 사후적으로 승리(혹은 패배)가 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프로도 등은 그때 비로소 주체가 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지젝의 주체로 해석한 프로도는 미래의 승리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형식이 된다. 그러나 프로도의 한계는 형식 이상의 것이 되지 못하는 점에 있다. 프로도는 운반자라는 자신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의 성취는 간달프, 아라곤, , 파라미르 같은 우군들 혹은 심지어 적대적인 인물인 골룸 등의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했다. 영화 바깥으로 나와 나를 프로도에 겹쳐보면, 저항할 수 있는 형식으로만 의미가 있는 나의 주체-효과는 나의 의지에 의한 행위와는 무관하다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 아무 생각 없이 살아도 도래할 승리에 의해 나도 혁명 주체가 된다면 누가 혁명가가 될 것인가. 이것은 지젝이 옹호하지는 않을 것 같은, 결정론적인 마르크스주의가 가진 취약점과 맞닿아있다. 즉 혁명은 반드시 일어날 테니 딱히 뭘 의도하지 않아도 된다는 마음 편한 낙관론이다.


 

3. 골룸


 

그래서 이 영화를 보다 급진적으로 읽기 위해서는 모든 논리로부터 빠져나가는 어떤 존재를 발견해야 한다. 그것이 골룸, 스미골이다. 자신을 ‘we’라고 지칭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골룸은 자기 안에 두 가지의 상반된 것이 섞여있는 모순된 존재이다. 골룸 안에는 두 개의 인격이 공존하며, 그는 반지 운반자인 프로도의 부하인 동시에 적이다. 이 기묘한 성격은 영화 안에서 골룸의 정체성이 어디에 있는지를 파악하기 어렵게 만든다.


이렇듯 모순된 존재이면서도 절대반지에 대한 골룸의 태도는 다른 이들이 가지는 양가적인 태도와는 사뭇 다르다. 다른 이들은 반지의 힘에 대한 욕망과 그것이 불러올 파멸을 동시에 인식하기에 조심스러운 반면 골룸에게 반지는 오직 욕망해야만 할 대상이다. 라캉이 말하는 강박증 환자와 비슷하게 골룸은 상징계 속의 불가능한 욕망에 좌초되어 끝없이 자신을 반지와 동일시한다. 그것은 자기 파괴적이지만 골룸에게는 그 자체가 윤리이자 행복이다.


프로도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주체인 다른 인물들과 달리 골룸은 대상을 향한 무차별적 욕망과 절대적 향유를 꿈꾸는 상징계 속의 이단아에 가깝다. 그는 관념으로도 행동으로도 이데올로기를 알지 못한 채 움직인다. 이런 점에서 봤을 때 골룸은 오히려 지젝이 다소간 비판한 알튀세르적 주체, 절대반지라는 이데올로기에 의해 호명된 주체에 가깝다. 반지가 파괴되기 이전부터 골룸은 자신의 의도적인 행위에 대해 전적인 책임을 지는, 분명한 주체이다. 절대반지가 가진 반대편의 의미-사우론과 그의 절대적 힘의 영원한 파괴-를 모르는 상징계 속의 결여된 주체에 불과하기는 하지만, 결국 그의 주체성덕분에 혁명은 가능해지고 (그를 제외한) 모두는 주체가 된다. 여기에서 혹시 지젝이 빠뜨린 어떤 것, 의도적인 주체성의 유용함을 찾는 것은 다소 지나칠까?

 

 


나는 지젝의 숱한 논의들 중 도래할 혁명, 미래완료의 시제로 제시될 혁명이라는 개념에 동의한다. 혁명은 그것이 완성되고 나서야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자신의 조건을 제시할 것이다. 그러나 혁명이라는 결과만으로 나의 주체가 성립된다면, 내가 무엇에 저항하는 시도는 내용이 갖추어지지 않은 텅 빈 형식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혁명가의 의지가 없는 혁명을 나로서는 상상하기가 어렵다. <반지의 제왕>의 프로도는 바로 그런 주체성을 잘 보여주는 존재다. 반지를 떼어놓고서는 그의 정체성을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소 저돌적인 투사를 필요로 할 수도 있다. 그것은 이 영화 안에서는 골룸이다. 상징계의 논리 안에서만 욕망하고 행동하는 주체를 상징하는 골룸은 결국 그 상징계의 전복을 가져온다. 나는 그를 지젝이 설명한 것과 같이 내용을 갖지 않은 형식적인 주체라든지 사후적으로 생성되는 주체가 아닌, 알튀세르 식의 호명된 주체로 해석하고 싶다. 반지 운반자로서 형식적 주체인 프로도와, 오랜 시간 동안 반지를 소유했던 자로서 상징계 안의 결여된 주체인 골룸은 서로에게 있어 일종의 분신(分身)이다. 프로도가 사후적으로 역할을 부여받기 위해서는 상징계 속에서 독립적인 기표로서 골룸이 필요하다. 반대로 골룸이 자기 주체성을 갖는 것은 이후의 혁명을 통해 프로도라는 주체가 서기 위해 자신의 임무를 다하는 한에서이다. (그래서 골룸은 마지막에 가서 죽을 수밖에 없다. 사우론의 세계 정복은 거기서 막을 내리니까.)


지젝도 물론 행위의 중요성을 여러 차례 강조하며, 특히 안티고네에 대한 비유를 통해 급진적인 행위의 창발성을 중요시 여겼다. 그러나 반역자를 매장하는 안티고네의 행위도 결국 상징계에 구멍을 내기 위한 행위라는 점에서 실재의 주체에 의한 행위이며 비의도적인 우발성에 기대는 것이다. 지젝을 더 급진적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그가 뛰어나게 논증해놓은 실재의 주체 논리만으로는 부족하다. 새가 두 날개로 날 듯이, 그가 만든 왼쪽 주체에는 의도와 목적성을 완전히 지우지는 않은 오른쪽 주체가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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